“저는 꼭 살아야 해요. 딸이 아파서 제가 지켜야 돼요. 헌데 다른 데서는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말만 해요.”
올해 8월 최석철 유성선병원 부인암센터 소장을 찾아온 난소암 환자 박언정 씨(40)의 말투엔 절박함이 배어 나왔다. 서울 경기의 이름난 대형 대학병원 5곳을 거치며 치료를 받았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 이름난 대형병원 5곳 돌아
박 씨는 이미 병원 생활에 이골이 나 있다. 지난해 5월 A병원에서 난소암 3기 판정을 받고 응급으로 바로 수술을 받았지만, 종양을 모두 제거하지 못했다. 암이 다른 장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A병원은 절제 부위가 넓을수록 출혈의 위험과 합병증 우려가 크기 때문에 남은 종양은 수술 후 항암치료로 줄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A병원의 소극적인 치료에 위기감을 느낀 남 씨는 6월 B병원에서 복막에 남아 있던 암도 제거했다. 하지만 우리 몸에 가장 큰 동맥인 대동맥, 하대정맥 주변까지 전이된 암까지 제거하진 못했다. 이곳을 섣불리 만지다가 터지면 과다출혈로 즉사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 이후 C, D, E병원에서 항암치료를 이어갔지만 암 덩어리는 줄지 않았다. 박 씨는 “수술은 안 되고, 항암치료는 말을 듣지 않았다. 절망스러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남동생의 손에 이끌려 최 소장을 찾아가는 차 안에서도 박 씨는 반신반의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 한편에서는 ‘서울 유명 병원에서도 못 고친 병을 대전에서 고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도 컸다.
최 소장의 눈에도 상황은 심각해 보였다. 항암제를 써도 암 수치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이미 암 세포가 내성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1년 이상 생존할 가능성이 낮아 보였다. 최 소장은 “돌고 돌아 나한테까지 오는 경우는 많지만, 병원을 5곳이나 거친 환자는 이번이 처음이다”라며 “수술 중 위험할 수도 있고, 수술 후 암이 재발할 가능성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존의 희망이 사라진다”며 수술을 결심했다.
○ 10시간에 걸친 대수술
최 소장은 10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진행했다. 대동맥과 하대정맥은 출혈이 있을 경우 위급한 상황에 빠질 수 있기에 더욱 긴장이 됐고 세심한 기술도 필요했다. 더구나 수차례 항암치료를 받아 암 덩어리들은 시멘트처럼 굳어 떼어 내기가 더 어려웠다. 최 소장은 정교한 기술로 척추에 고정된 대동맥과 하대정맥을 분리해 들어 올렸다. 그런 뒤 대동맥과 하대정맥 주변의 암 덩어리를 일일이 제거했다. 수술 후 4개월, 암 수치는 정상화됐고, 아직 재발하지 않았다.
난소암이 광범위하게 전이됐을 경우 이처럼 수술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경우는 드물다. 우선 출혈로 인한 위험성이 크고, 암 제거 부위가 넓을수록 합병증 위험도 높기 때문이다. 최 소장은 “사람마다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가 다를 수 있는데, 내게 최선은 현존하는 최선의 수술법으로 암을 최대한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최대한 종양을 남겨두지 않는 게 생존율이 높은 편이다. 브리스토프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에 따르면 전이된 암을 50%만 제거했을 때보다 최적수술(눈에 보이는 암을 100% 제거)했을 때 생존 기간이 약 33% 늘어난다.
○ 오피스텔 마다하고 병원에서 숙식
서울에 집이 있는 최 소장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병원 검진센터의 입원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병원 측에서는 오피스텔 제공을 제안했지만, 최 소장은 더 많은 환자를 보고, 응급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이같이 결정했다. 부인암은 수술 후 관리가 중요하고, 응급 시 출혈이 많아 1분 1초가 위급하기 때문이다.
최신 수술법을 익히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최 소장은 2004년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의 호켈 교수에게 ‘확대 골반 절제술(리어 수술)’을 배우기 위해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리어 수술은 골반벽까지 전이된 암 환자의 수술법으로, 최근까지 국내에서는 골반까지 전이될 경우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최 박사는 헤켈 교수의 수술 장면을 보고 싶어 보조를 자청했지만, 독일 의사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최 소장은 당시 수술장에서 막대기에 카메라를 매달아 사다리를 올라탄 채 14시간 동안 수술 장면을 녹화해 공부했다.
최 소장의 수술을 향한 열정과 소신 진료가 알려지면서, 전체 진료인원의 15%는 서울 경기에서 온 환자들로 채워지고 있다. 최 소장은 “앞으로 길어봐야 수술할 수 있는 시간이 15년 정도다”라며 “박 씨의 사례처럼 꺼져가는 희망을 되찾아주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 ‘조용한 살인범’ 난소암… 조기 발견하면 80∼90% 완치 기대 ▼
난소암은 다른 부인과 암과 달리 초기 자각 증상이 없는 편이다. 암 선고를 받은 뒤에야 뒤늦게 “골반이 불편했다”, “하복부가 가끔 아팠다” 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자궁경부암은 일반인이 많이 알고 있는 자궁경부세포진 검사로 선별 검사를 할 수 있어 조기에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난소암의 경우는 확립된 선별 검사조차 없다. 대부분의 환자에게서 병이 진행된 상태에서 발견된다. 난소암을 ‘조용한 살인범(Silent killer)’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 때문에 난소암은 다른 이유로 산부인과 진찰을 받다가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행히 조기에 발견되면 80∼90% 완치를 기대할 수 있다. 정기적인 부인과 진료 및 초음파 검사가 난소암의 조기 진단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매년 자신의 생일이나 특정일을 정해 놓고 난소암을 비롯한 부인과 진료를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가족력이 있을 경우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난소암은 폐경 전후 또는 폐경기 여성에게서 주로 발생하나 최근 젊은 여성에게서도 발견된다. 어머니 또는 자매가 난소암 병력이 있는 경우 발병률이 3배 정도 높다고 알려져 있다.
동아일보